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그의 지인들과 나눈 대화가 담겨있는 ‘파이돈’을 읽었습니다. 2021년 2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 내적으로 끊이질 않았던터라 ‘파이돈’을 읽기로 결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친구들의 질문과 소크라테스의 대답 그리고 친구들이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지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부연 설명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대화가 일어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그의 죽음을 결코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설득하기 위함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가 처음으로 주목한 질문은 왜 인간은 스스로의 목슴을 해치면 안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 없이 스스로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라면 당연히 죽음을 동경하게 될거라는 말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라면 당연히 현명한 사람들 즉, 신의 곁으로 가는 것을 원할테니 신이라는 우리의 주인에게 가는 길인 죽음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철학자라면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있지만, 신의 소유물인만큼 신의 허락을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였죠.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그의 논리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과 같은 절대적 진리 혹은 현명함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평소에도 늘 죽음을 동경하며 죽음과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선사하는 각종 즐거움과 쾌락의 자극을 멀리하며 살아서도 죽은듯이 살아있는 것이 철학자라고요.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의 육체와 감각기관은 현상을 왜곡되게 바라보게 만드는 일종의 악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싶다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오로지 추론으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늘 죽음을 동경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더해 소크라테스는 어떤 철학자가 드디어 죽음이라는 이상적인 상태에 진입하여 육체로부터 해방되었는데 그 지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면, 그의 지인들은 거짓되고 왜곡된 그의 신체를 사랑했던 것이며 그의 철학자로서의 신념을 존중하지 못한 것이라는 논리를 이어갑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책 초반부터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몸, 육체, 감각 등은 이성이 현명함을 찾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방해되는 요인으로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책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몸, 육체, 가시적인 속성을 가고 있지만 영혼과 이성은 비가시적이며 육체의 감각에 의해 좌우되지 않은만큼 변치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육체는 죽음으로 소멸하지만 영혼은 죽어도 소멸하지 않고 불멸한다는 반대적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는 ‘상기’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새로 태어나 인생을 처음 살지만 직관적으로 열등함에 대한 판별을 할 수도 있고, 서로 유사성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하여서도 또다른 것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기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영혼 불멸의 증거라고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즉, 감각지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기도 전에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책 속의 소크라테스 친구들은 충분히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균형이 깨지면 소멸하거나, 여러 육체를 거쳐나간 영혼이 닳고 닳아서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죠. 이를 설득하기 위하여 그는 반대가 반대를 낳지만 그 반대가 반대로 환원되지 않음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먼저 반대가 반대가 낳는다는 것은 책 초반에 설명된 개념인데 ‘자고 있다’는 상태값이 있어야 ‘깨어있다’는 상태값이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삶’이 있어야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들로부터 살아있는 것들이 생긴다는 논리인데, 모든 것들이 이렇게 반대되는 쌍을 통해 순환(반환점 돌기)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이 일방향으로 치달아 생겨남이 없이 종료상태가 될거라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죽음-육체라는 것을 통해 삶-영혼이라는 것이 탄생하였지만 영혼의 불멸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반대되는 개념은 반대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음을 한번 더 설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짝수와 홀수를 통해 반대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반대적인 개념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숫자 3은 홀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4는 짝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과 4는 그 자체로 반대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홀은 짝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홀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존재만으로 반대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서로의 개념을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로 존재합니다. 세상에 ‘차가운’ ‘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영혼은 죽음으로부터 태어났지만 ‘죽음’이라는 속성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사이고, 서로 반대적 속성의 관계이므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불사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왜 육체와 감각지각에 대해 안좋은 평가를 거듭하는 걸까요? 책에 따르면 육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는 강렬한 경험은 실제 그것의 중요도와 무관하게 중요도를 설정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각이 인지한 것이 좋았으면 무조건 참이라고 여기는 우를 범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감각에 휘둘려서 방탕하게 산 사람의 영혼은 동물로 태어나며, 현명함과 절제를 모르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의 영혼은 하데스에 바로 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현명하고 정의로운 삶을 산 사람들은 자유롭게 해방되어 우리가 아직까지 본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거처에 도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나 치열하게,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본인은 곧 아름다운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자신의 죽음을 측은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설득하였지만 친구들은 여러 이유로 각자 많은 눈물을 쏟았다고 책에 적혀 있습니다.
저 역시 소크라테스의 통찰을 통해 엄마가 없는 삶을 더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기대를 가지고 독서를 시작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신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육체로 존재함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엄마는 교회 권사님이셨고 엄마를 잃고 처음으로 사적인 약속으로 만났던 친구도 마침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친구가 어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을거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정말 좋은 곳에 가셔서 다행이라는 안도는 아니었고, 엄마가 믿어왔던 세계에서는 천국에 가는 것이 정말 좋은 일로 여겨진다고 하니, 적어도 엄마는 나를 두고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을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쉬워만은 하지 않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존재와 더이상 소통할 수 없다는 명백한 상실에 대한 위안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대로 친구가 철학자로서 늘 동경하는 상태로 향했다해도, 내 곁에 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슬픔의 감정에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상대의 행복에도 슬픔을 기쁜 마음으로 채우는 것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은 왜 타인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로 다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이에 대한 대답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는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대답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떠한 마음이어야 나도 철학자인 친구의 해방을 진심으로 같이 즐거워해줄 수 있을 것인가는 결국 나의 주인인 신을 인정해야 하고, 신이 하데스에 마련한 아름다운 곳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어야 하며, 인간이란 혹은 이성이란 본래 어떤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당위적인 존재의 상도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크라테스도 ‘파이돈’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과연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해봐야 할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의 부분은 차치하고, 이성이나 현명함 그리고 절제 같은 삶의 특정 방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당위에 대해서라도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방황이라고 겁을 주는 방식 외의 논리로 더욱 설명해주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육체라는 감각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위적으로 여기는 것에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체는 그의 말대로 여러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야할 사후 세계라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아직 저는 현실의 내 육체가 보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는 꽤나 중요하여 그 감각이 느끼는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외적인 것에 치중하여 꾸미고 사치하는 것을 분명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절제 속에서도 내 육체와 현재 지금 이 땅 위에서의 삶 역시 소중합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중요함을 경시하고 사후의 영혼의 행복만을 위해 삶을 영위한다면, 현재 삶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활동을 게을리 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생에서는 정작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사후에 만날 신의 마음에 드는 일만이 중요한 사람을 훌륭한 철학자라고 찬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파이돈’ 의 책 내용이 전개되는 내내 이분법을 통해 현상을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이부분 덕분에 논리적으로 완결성을 갖고 설득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대립되는 두가지의 개념 중 육체와 영혼처럼 옳고 그름의 정답이 정해져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박적으로는 읽는 내내 감탄을 하였습니다. 특히 죽음과 영혼의 대비에서 삶을 설명하고, 불사를 설명하는 논리 전개가 저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방식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습니다. 플라톤의 저작을 읽어본 것 역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철학책을 읽어보고 제 안의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고 싶어졌습니다.